사실 어제 텝스 보자마자 후기를 쓰려고 했는데 텝스를 다시 보게 될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뒤숭숭하여 같이 본 친구랑 삼겹살에 쏘맥 먹고 자느라 못썼다. 후식으로는 볶음밥 대신 초코 크림치즈 브라우니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었다.
🛫 발단
나는?????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텝스를 보겠다고 했을까?????
한 달 전의 나에게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 그거슨 바로 서울대 대학원 입학이다! 그리고 서울대 대학원 공과대학 지원을 위해서는 텝스 327점 이상 혹은 토플 96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 때마침 고등학교 친구가 서울대 대학원 지원을 위해서 다음달에 텝스를 본다길래 나도 친구따라 텝스 지원을 했다. 당시 우리집에는 뉴텝스는커녕 구텝스 문제집도 한 권도 없었고 있는 단어장이라고는 고등학생때 보던 능률보카 수능실전편 뿐이었다. 시험까지는 고작 한달도 안되는 시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최근에 텝스를 봤다는 친구에게 연락해 발등에 불이 떨어져 따뜻한 여름을 보내고 있는 내 상황을 설명하고 조언을 부탁했다. 그랬더니 본인은 텝스의 정석 한 권으로 2주만에 327점을 땄다는 거다! 나랑 고등학교 때 영어 성적이 비슷했던 친구였어서 그 친구 말만 믿고 텝스의 정석 한 권만 달랑 사갖고 텝스 공부를 시작했다. 스불재의 시작인 것이다..
👀 텝스 첫인상
'컨설텝스'라는 텝스 전문 인강 사이트에서 무료 텝스 진단고사를 제공한다길래 학교 도서관에서 한 번 풀어봤다. 첫번째 영역인 LC 시작 전까지 '고딩때 영어는 계속 1등급이 나왔었고(절평임) 영어 교양수업도 성적 잘 받았으니까 327점은 껌이겠지?ㅎ.ㅎ'라며 머릿속에서 첫응시에 327점을 가뿐히 넘기고 서울대 대학원에 멋지게 지원하는 나를 상상했다. 에어팟을 꼽고 mp3를 틀자마자 과거의 나에게 풀스윙 딱콩을 날려주고 싶어졌다. 그렇게 600점 만점에 220점을 받고 멘탈과 자신감과 자존감이 아작난 채 터덜터덜 집에 갔다. 텝스를 모르는 친구들한테 텝스 모의고사 봤더니 220점 나왔다 하니까 나한테 텝스가 혹시 300점 만점이냐고 물어봤다.
- LC: 수능 듣기와 토익 LC 정도의 속도를 기대했다. 근데 무슨 말하는 속도는 노빠구인데다 a, b, c, d 지문도 문제지에 안나와있다. '옳은 것은?'도 아니고 '가장 옳은 것은?'이라 맞는 것 같은 말 4개 해놓고 가장 맞는 것 골라야 해서 짜증났다. d 듣고 있으면 a, b에서 뭐라고 했는지 까먹는다. 파트 5에서는 모든 걸 포기하고 답안과 하트시그널을 찍는다는 생각으로 왠지 끌리는 답안에 체크했다. 찍엇다는 뜻이다
- Voca & Grammar: 아는 단어가 있어야 풀지 ㅋ.ㅋ 뒷부분은 미국인도 모를 것 같은 단어들만 나온다. 그와중에 merge, compile, convolution 이런 단어들 보이면 반갑다. 문법은 나머지 파트보다는 그나마 풀만했다. 단어 문법 합쳐 25분에 60문제라 시간 엄청 부족해서 뒤에 20문제는 다 찍었다.
- RC: 반쯤 미쳐버린 수능영어 같았다. 뒤에 한 15문제는 시간이 없어서 찍었다.
전체적으로 시간이 엄청 엄청엄청 부족했다. 단어, 보카 파트에서는 25초에 1문제 풀어야 하는 꼴인데, 텝린이는 그런거 못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주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27점이 그렇게 높은 커트라인은 아니어서 모든 문제를 정확하고 빠르게 다 풀어야 하지는 않고, 천천히라도 맞아야 하는 문제들을 다 맞는 걸 목표로 잡고 공부를 시작했다.
📝 본격적인 공부 시작
매일 8시에 일어나 LC 1세트 풀고 오답한 뒤 점심먹고 단어 외우고 시험보고 RC 문제 풀고 오답하는 삶을 살았으면 여기다가 적을 게 많았겠지만 나는 친구의 말만 듣고 인강도 없이 텝스의 정석 책만 열심히 풀었다. 300점대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은 청해 파트 4, 5 / 독해 파트 4는 포기해도 된대서 과감히 포기하고 2주 반동안 청해 파트 1, 2, 3 / 독해 1, 2, 3 위주로 공부했다. 단어는 시험 1주일 전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발등에 떨어진 불이 막 다리를 타고 온 몸으로 퍼질라고 하는 게 느껴져서 서점에 달려가 해커스 텝스 노랭이를 샀다. 시험 1주일 전에 산 주제에 이걸 외울 바에 그냥 찍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Day 5까지 외우고 텝스를 보러 갔다.
청해에서는 확실히 아무런 기록도 안하고 듣는 것보다 각 문장별로 핵심 내용이나 키워드를 기록해 가면서 푸는 게 많이 도움이 됐다. 파트 1은 그냥 asldfka? a. dfkelm ..수준으로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a, b, c, d 답안만 o, x로만 기록했고, 파트 2와 3에서는 여자, 남자 대화마다 주요 내용을 기록해 두고 a, b, c, d를 들으면 확실하게 정답을 고르는 데 도움이 된다.
단어와 문법에서는 시간 내에 모든 문제를 1번씩 보기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빨리 푸는 연습을 했다. 100중에 1만큼 알든 2만큼 알든 별로 차이 없을 것 같아서 단어 공부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문법은 자주 나오는 유형들(현재완료, 단수/복수 구분, 미래완료 등)만 따로 공부했다.
독해는.. 많이 풀었다..
텝스의 정석은 시험 10일 전에 다 풀고, 10일동안 4개의 모의고사를 봤다. 텝스의 정석 뒷부분에 있는 실전 모의고사 3개와 서울대학교 텝스관리위원회 공식문제집 1회 모의고사를 봤는데, 아주 드라마틱한 점수 상승이 있었다. 텝스의 정석 모의고사를 푸는 동안 281-288-328로 점수가 올랐고, 마지막 텝관위 공식문제집 1회 모의고사에서는 371점을 받았다. 근데 텝관위 공식문제집 문제들이 쉽다는 말이 있어서 저건 제외하고, 3번째 모의고사에서 목표 점수를 넘겼다고 하더라도 고작 1점 차이라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다. 220점에서는 많이 성장한 거긴 하지만 그 전 1, 2회 시험에서 워낙 개떡같은 점수를 받은 것도 있고.. 그래서 시험이 많이 걱정됐다.
📍 시험 당일
서울에서 볼지 대전에서 볼지 고민하다가 그냥 대전에서 봤는데, 집에서 버스타고 한 15분 거리인 남선중학교에서 응시하게 되었다. 2시 20분까지 시험장에 도착해야 했는데, 부모님께서 점심에 맛있는 거 먹자며 나간 김에 시험장에 데려다 주시겠다고 해서 쫄래쫄래 따라갔다. 대학교 입학 이후 학교 외의 장소에서 시험을 치는 게 처음이라 다들 시험장에 어떤 복장으로 가는지 모르겠어서 엄청 고민하다가 대충 평소에 입는 옷 입고 갔다. 막상 가보니까 근데 잠옷 차림으로 오는 사람도 있고 원피스 입고 오는 사람도 있더라. 괜히 고민했다. 입고 싶은 옷 아무거나 입고 가자~
강의실이 아닌 무려 교실..!에 들어가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책상에 앉아서 창 밖 운동장을 보고 있으니까 중학교 다닐 때 생각이 막 났다. 그렇게 추억에 젖어있는데 책상 위에 놓인 텝스의 정석 책을 보니까 기분이 드러워졌다. 인생은 쉽지 않다.
텝스 시험을 치기 위해서 꼭 가져가야 할 준비물은 신분증, 컴퓨터용 싸인펜, 수험번호(수험증 필요ㄴㄴ), 수정테이프다. 신분증은 휴대폰 내기 전에 1차로 사진과 실물을 대조하며 꼼꼼하게 검사하시고, 2차 검사는 독해 풀고 있을 때 얼굴 확인은 하지 않고 신분증만 간단히 체크하시며 문제가 없을 경우 OMR 카드의 감독 확인란에 사인하고 가신다. 컴싸와 수정테이프는 답안지 작성, 수정에 꼭 필요하다. 수정테이프가 없으면 답안지를 교체해야 하는데, 답안지 교체하는 시간이 너무 아까우니 꼭 챙겨가도록 하자. 그리고 수험증은 굳이 출력해갈 필요는 없으며, 수험번호만 잘 외워가면 된다. 갖고 있는 아날로그 손목시계가 없어서 시간 확인을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우리 시험장에서는 각 영역 끝나기 5분 전, 1분 전에 안내해 주셔서 시간 내에 답안지 잘 작성했다. 그리고 칠판 앞에 시계를 갖다놓아주셔서 틈틈이 보면서 시간 확인 가능했다.
10월 2일 텝스 시험의 간단한 감상평은 다음과 같다.
- LC: 들으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질이 이상하거나 컴싸가 안나오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다음달에도 텝스를 보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사들의 후기를 보니 역대급 LC라고 해서 그냥.. 나만 망한 건 아니구나 하고 안심이 됐다. 어쨌든 상대평가니까..
- Voca & Grammar: 실전에서 처음으로 25분 내에 60문제를 다 봤다. 문법 파트 3에 신경쓸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 RC: 여태까지 풀어왔던 RC 문제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나왔던 것 같다. 24문제 정도 풀고 나머지 9개는 b로 찍었다. 마녀사냥 문제에서만 3분을 썼다. RC는 도저히 빠르게 풀 수가 없다 😇
잘 말아먹었다는 생각에 친구와 다음 텝스 시험을 기약하며 버스를 타고 둔산동으로 돌아와 삼겹살에 쏘맥을 말아먹었다. 주량이 늘은건지 뭔지 원래 주량이 소주 6cm 정도였는데 맥주 2잔 + 소주 2잔을 마시고 취하지 않았다. 장족의 발전이다.. . ...
🔫 가채점 결과
후식까지 알차게 챙겨먹고 집에 와서 푸욱 잔 뒤에 아침에 일어나 가채점을 해봤다. 컨설텝스에서 복기해 둔 LC, RC 지문 내용과 정답을 바탕으로 단어, 문법을 제외하고 LC, RC, 그리고 문법 파트3만 가채점해본 결과 298점이 나왔다. LC를 대차게 망해버린 줄 알았는데 평소 받던 점수보다도 더 높게 나왔다. 어이가 없다? 내가 단어,문법 파트에서 죽만 쑤지 않았다면 327점은 충분히 넘길 수 있을 것 같은 점수다. 다음달 텝스 응시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희망이 보여서 일단 8일까지 기다려보려고 한다. 멍미 (꒪⌓꒪)
어쨌든 좋은 경험이엇다~
+ 📝 10/9 점수 발표
371점으로 커트라인을 넘겼다 ! 1트만에 텝스를 졸업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꼴랑 문제집 하나에 모의고사 4번 친 게 다지만 정말 다시는 공부하고 싶지 않은 난이도와 단어 수준이었다.
그럼 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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